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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 장군총의 신비로운 숫자와 경천(敬天)사상

by 따그니(화려한백수) 2007. 4. 5.

 

고구려 장군총의 신비로운 숫자와 敬天사상

 

 

중국의 집안, 즉 국내성이라고 이름한 고구려의 옛도읍지에 가면 동방의 피라밋이라고 불리는《장군총(將軍塚)》이 있다.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의 봉금정책을 무시하고 생계를 위해 지금의 집안 일대로 들어온 중국인들과 한반도를 넘어 중국에 들어온 조선인들이 무덤이 웅위로움을 보고 어떤 변관을 진수하던 장군의 무덤인 줄 알고 《장군총》 혹은 《장군분(將軍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방의 피라밋으로 불리는 장군총. 그 거연한 모습에 무수한 신비로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북으로는 룡산을 등에 업고 서로는 대우산과 이웃하고 동남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앞에는 드넓은 개활지에 호태왕비(광개토왕비)와 호태왕릉을 마주하고 있으며 멀리 고구려의 도성인 국내성(집안시)를 바라보고 있는 장군총, 좋은 지세를 탔을 뿐이 아니라 기세 또한 웅장하다.

사서들은 고구려가 28대에 걸쳐 705년간이나 그 사직을 이어왔다고 한다. 28대에 705, 중원땅의 한 왕조의 2~300년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도 긴 역사시기이다. 하기에 고구려의 역사는 중원의 서한왕조부터 당나라에 이른다. 따라서 아직은 고구려시기 고서들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700여년 간 수많은 교체를 겪었던 중원 왕조들의 사서기록에 널려있는 편단을들 주어 모아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며 앞으로 소개하게 될 호태왕비의 기록을 중요한 근거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고구려 왕조의 18대에 걸친 임금들의 18기의 무덤이 집안 주위에 있는 퉁고우(洞溝)무덤군에 널려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장군총은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라고 한다.

장군총은 정밀하게 깎은 화강암으로 축조했는데 무덤은 거의 정방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31.58m, 지상에 모두 7층의 계단이 있어 22층의 돌로 쌓고 안에는 흙과 자갈을 이겨 다져 넣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무덤의 높이는 12.4m, 모두 1100여개의 돌로 축조되어 있다고 한다.

묘실은 3번째 계단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묘실의 문은 5번째 계단에 나 있으며 230도의 서남방향을 향해 있다. 묘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기 5m, 높이가 5.5m, 묘실의 바닥에는 크기가 같지 않은 두개의 돌침대가 놓여 있으며 묘실의 천정은 통 돌로 덮였는데 무게가 약 50t가량 된다고 한다. 묘실 정상의 한 변의 길이는 13.2m~13.7m로 변 마다 20여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전에는 난간혹은 묘실 위에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석을 쌓고 안에 자갈을 다져 넣어 축조했음으로 자체 중량의 장력(張力)으로 벽이 겉으로 밀고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면에 10여 톤씩 되는 바위 3개씩 받쳐놓았는데 지금 하나는 없어지고 11개가 있다.

장군총을 축조한 거석들과 벽을 받쳐놓은 거석은 모두 22km밖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것인데, 1500여년 전, 운반도구와 기중기술이 낙후한 고구려 시대에 이처럼 방대한 공정을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인들의 비상한 지혜와 건축, 운반기술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릉묘로 알려진 장군총 남쪽 60m되는 곳에서 배수구를 발견한 것으로 보아 장군총 주위에는 너른 릉원과 묘역(墓域)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장군총의 동북쪽에는 동남에서 서북으로 자리 잡은 무덤군이 있었고, 서남 200m되는 곳에는 제사유적지가 있는데 면적은 5hta나 된다.

실로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 밖에 어떻게 다른 표현을 할 수 가 없다.

 

고구려인들의 경천(敬天)사상

왕도의 기운이 서서히 어리는 국내성, 그 동북쪽에 거연히 솟아있는 장군총, 2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지각운동도 많이 겪었겠지만 여전히 숭엄한 모습을 변하지 않고 있는 장군총,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고구려인들의 지혜와 7백여년을 이어온 사직의 역사뿐이 아니다. 장군총은 그것보다는 고구려인들의 하늘을 우러르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경천(경천)의 사상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인본주의 사상이기도 하다.

 

 

장군총 묘실의 천정. 50여톤이나 되는 거석이라고 한다.

 

장군총은 방형계단식식실묘(方形階段式石室墓)이다. 산의 정상봉이 아닌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한 산마루에 우뚝 솟아 있으나 하늘을 찌르는 그런 뾰족한 끝이 없이 무덤 위는 평평한 대()로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이집트의 추형(錐形)의 피라밋과는 다른 고구려 사람들의 경천사상에서 오는 겸허함이다.

뾰족함이 말하는 바는 탐구와 진취와 함께 방어와 공격이 그 주요 기능이다.내부 심령 깊이에서 오는 팽창에 따른 확장과 점유와 탐욕에서 오는 공격과 방어를 위한 데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밋이 바로 그런 방어와 공격의 대표성적인 축조물이다. 이집트 피라밋에 어린 신화와 전설이 이런 것들을 잘 말해주고 있으며 《바로의 저주》와 같은 것들이 모두 이를 실증하고 있다. 알렉산터의 확장과 무덤에 진입한 자에 대한 바로의 저주 역시 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군총은 그것이 아니다.

장군총은 7층의 계단으로 되어 있고 무덤 맨 위는 평평한 대()이다.

평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로 평안함이요 평화요 겸허함이다.

뾰족함이 말해주는 것이 공격과 방어와 진취라면 평면이 말해주는 것은 평안과 접수와 겸허함이요, 자기의 실력에 바탕을 둔 듬직함이다.

하늘의 기를 받고 하늘의 뜻과 하늘의 순리를 따라서 행하는 것, 그리고 하늘의 아들(天之子)로서 죽은 다음에도 하늘의 뜻을 따르는 그런 경천애민(敬天愛民)과 겸허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고구려와 고구려의 시조 주몽왕이 북부여 탈출 전설, 그리고 주몽왕의 탄생설화들은 모두 고구려 왕족의 도통을 하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주몽 탄생설화에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는 하백(河伯, 강의 신)의 딸이다. 유화와 훤화(萱花), 노화(蘆花)  세 자매가 압녹수(鴨綠水. 일설에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한다. 어쩌면 송화강으로 봄이 그럴 듯 하다. 사서의 기록과 고고학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 길림성 중부의 길림시(吉林市)에 바로 부여국의 도읍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압녹수를 송화강으로 봄직하다.)가에서 노는 데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가 인간세상을 두루 운유하다가 이들 세 자매 가운데서 유화가 가장 예쁜 것을 보고 유화와 사랑을 맺게 되고, 유화가 임신한 다음에 해모수는 하늘나라로 떠나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자기의 허락도 없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맺고 임신을 한데 대로한 하백, 거기다 이제 하늘로 돌아간 해모수가 다시 오지 않자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게 된 유화, 이에 대로한 하백은 유화를 압록수에 유배를 보내버린다.

 

장군총을 받친 거석들. 한면에 3개, 4면 총 12개, 지금은 한개가 일어져 11개만 남았다고 한다.

거석 하나의 무게가 10톤 정도 된다고 한다.

 

 

  압록수에서 고기를 잡아 먹으며 살아가던 유화는 어렵을 나온 부여왕을 만나게 되고, 결국 부여국에서 아들 주몽을 낳게 된다.

이렇게 서자(庶子)로 태어난 주몽이 왕자 대소(帶素) 등의 모살(謀殺)을 피해 도주하다가 강이 가로막았을 때도 주몽은 물에 채찍질을 하면서 자기가 천제의 후손인데 물속의 짐생들은 다리를 놓으라고 호령하자 거북과 자라들이 떠오르며 다리를 놓는다.

이처럼 고구려는 그 왕통(王統)을 하늘에 잇고 있다. 그만큼 그들은 하늘에 대해 겸허하고 하늘의 의사를 따르고 하늘로부터 그 뜻을 우러러 받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하늘에 대해 경천의 마음만 가질 뿐 공격의 자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하기에 고구려의 옛 무덤들은 하나 같이 끝이 하늘을 향해 뾰족한 것이 없다. 모두다 정상 부위는 4면 추형의 뾰족한 부분을 자른 제형 모양으로 믿믿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장군무덤이 그럴 뿐이 아니라 퉁고우(洞溝)무덤군에 있는 고구려 귀족무덤군이나 호태왕릉 모두가 다 그렇다.

이런 무덤이나 축조물이 사람들에게 주는 첫번째 인상은 바로 평안함과 안전함, 그리고 듬직함과 묵중함이다.

 

장군총은 과연 무덤이었던가?

장군총은 과연 무덤이었던가?

학자들은 장군총을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장수왕 14년에 평양성으로 천도(遷都)를 했는데 장수왕 무덤일 수가 있느냐고 질의를 하고 있지만 장군총을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는게 사실이다.

하다면 장군총은 과연 무덤이었던가?

우리는 십여년 전의 일도 때로는 기록이 근거로 남아 있어도 그 기록의 진실여부와 정확여부에 의문부호를 다는 경우가 많다. 하다면출처 : 고구려 장군총의 신비로운 숫자와 경천(敬天)사상

글쓴이 : 부여의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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