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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방 건강 싱식

by 따그니(화려한백수) 2011. 4. 18.

 

고조선 시대의 한의학

 

고조선의 한의학은 상고시대에 비하여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우선 상고시대에 존재했던 원시의료의 하나인 샤머니즘 이외에 약물을 이용한 치료법이 등장하였으며 고조선 나름대로의 독자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로는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가 기록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 제왕운기(帝王韻紀)등의 우리 서적과 중국최고의 원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을 들 수 있다. 이들 서적에 수록되어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미 고조선시대에 한의학적 치료법의 하나인 약물요법과 한의학적 치료도구의 하나인 폄석침(砭石鍼)이 사용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특히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에 직간접적으로 보이는 쑥과 마늘의 경우 중국이 본초학의 자랑으로 생각하는 신농본초경에도 기록되지 않은 약물로 고조선의 한의학이 중국의학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성내지는 우수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뿐만 아니라 황제내경소문에 폄석(砭石) 또한 동방에서 전래되었다고 적힌 기록은 폄석(砭石) 이외에도 다른 치료법이나 치료도구가 고조선에 의해 중국에 도입되었음을 간접시인하고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리 에서 나온 석침, 골침등과,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후위서에 보이는 기록도 우리 한의학이 중국의학을 단순하게 따랐던 것이 아니라 독창적로 발전해 왔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고, 한서예문지나 명의별록 등에 기재된 한약재의 산지에 한반도의 지역명이 기재된 것으로 볼때 이미 한반도 내에서 약재의 채집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한의학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한의학은 원시의료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없는 고구려의 한의학 관련사료 부분적으로 이나마 남아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과 인접한 까닭에 자체의 기존문화이외에 중국문화까지 수입하여 고도의 문화국으로 성장하였던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형종 11년에 왕도가 편찬한 바 있는 외대비요방 18권 각기충심방(脚氣衝心方)에 "이 고려노사방(高麗老師方)은 서왕방(徐王方)과 서로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고려는 시기상으로 고려왕조가 나타나기 전이기 때문에 고려가 아닌 고구려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고려 노사방과 같다는 중국 북조시대 북제의 서왕방(徐王方) 5권을 서지재(徐之才)가 지은 시기가 고구려가 존재했던 때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확증 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노사방은 백제의 백제신집방과 신라의 신라법사방등과 함께 삼국시대 한의학의 편린을 간접적으로 엿볼수 있는 좋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중국 양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이 편찬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를 비롯하여 송(宋)나라의 당신미(唐愼微)가 지은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 등에서도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 오미자(五味子), 무이(蕪荑) 등이 고구려에서 생산되며, 특히 무이는 고구려에서만 생산된다고 설명하였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한의학에 대해 언급은 우리나라의 기록보다는 다른 나라의 서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신농본초경 집주와 경사증류비급본초에 단편적으로 보이지만 중국의 후주서와 일본의 의심방등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서적에 따르면, 백제의 정부조직 12부중에 약부(藥部)가 있었으며, 약부에서 의약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의박사(醫博士), 채약사(採藥師), 주금사(呪禁師) 등의 직책이 존재했음도 알 수 있다. 백제인은 한문에 능통하고 음양오행과 의약등을 알고 있으며 오곡과 음식 그리고 약품이 비슷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은 백제의 의학 수준이 중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질 정도였음을 직접적으로 입증시켜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신집방이란 서명은 백제가 고구려를 통해 들어온 중국의 처방에서 벗어나 독자적모습의 처방서를 제작했었음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또한 백제 무녕왕 13년부터 일본에 오경박사를 보내고 백제 성왕 31년부터 일본의 의박사와 채약사를 보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한의학수준이 일본을 능가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중앙집권형태를 갖춘 나라였다. 또한 우리나라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외래문물을 접하기 시작한 시기도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신라로 하여금 여러 측면에서 독자성을 유지하게 만들었으며, 한의학적인 측면에서도 고조선시대에 행해졌던 무술을 이용한 의료와 경험에 의한 치료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제3권 아도라기조에는 공주가 병에 걸렸는데 무의도 효험이 없어서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에도 의사와 무의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뿐만 아니라 신라 실성왕 13년(414)에 김무(金武)가 일본의 윤공왕(允恭王)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약방문(藥方文)의 의거하여 왕의 병을 치료했다는 일본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신라 의학의 수준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한의학

 

통일신라시대에는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던 사회적 추세와 발맞추어 의학교육기관을 설치하였으며, 신라 법사방, 그리고 의료제도 등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 39권 직관지(職官志) 중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효소왕 원년(692)에 의학교육을 맡은 의학이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經), 침경(針經), 맥경(脈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 등의 과목을 교육하고 박사2인을 두었다. 또한 삼국사기 같은 조에 있는 기록에는 약전-보명사-약전으로 바뀌었던 의료기관이 있었던 사실과 관리들의 명칭을 알 수 있다. 특히 약전은 백제 때 설치되었던 약부와 동일한 업무를 맡아보던 의료기관이었으며, 위의 기록에 수록된 의료와 관련된 관직 이외에도 의관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선발하여 시의에 해당하는 공봉의사(供奉醫師)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없지만 일본의 의서인 의심방(醫心方)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 법사방(新羅法師方), 신라법사비밀방(新羅法師秘密方) 등의 의서는 서명에 신라법사라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기존에 인간이 아닌 귀신에게 빌어 질병을 고치려했던 태도에서 탈피, 불교가 흥성했던 분위기와 관련하여 불력을 전달하던 법사에게 무병을 빌었던 통일 신라민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서적에 통일신라시대의 인삼과 국화를 비롯 백부자와 박하,형개 등 20여가지에 이르는 한약재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에 인삼과 우황등이 외국인들에게 주는 귀중한 품목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약재가 수출,입 되었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의 한의학

 

고려의 한의학은 신라의 문물제도를 계승했던 고려 초기의 일반적인 양상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의료제도를 따랐었다 그러나 성종 때에 관제가 바뀌면서 의료제도도 바뀌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송원의학이 도입되기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학의 비중이 높았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비롯한 어의촬요방(御醫撮要方)과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등의 출현으로 인해 고려의 전통의방이 널리 퍼졌던 것이다. 김영석이 편찬한 고려 최초의 한의서인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은 신라 등의 의서에서 백성들의 치료를 위해 효과가 있는 내용을 뽑은 것이며, 어의촬요방(御醫撮要方)은 최종준이 고려때 어의들이 쓰던 처방 가운데 중요한 것을 모아 묶은 것이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은 백성이 쉽게 이용하게 하기 위해서 서민들이 구하기 쉬운 한약재 55종에 이르는 질병 및 치료법과 함께 소개해 놓은 것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이다. 이들 서적들은 현존과 부전을 떠나서 백성들과 함께 계승되어온 고려한의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도 향약고방(鄕藥古方),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 등 다수의 향약과 관계된 한의서가 있었던 것은 곧 고려의 한의학이 민족의학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고려의 한의학을 살펴보는데 있어 주목해야 될 것 가운데 하나가 정형화된 의료기관의 등장이다.

 

려 때에는 중앙의 의약을 맡아보던 태의감(太醫監)이 있었으며 서민을 대상으로 구료사업을 펼쳤던 제위보(濟危寶)와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혜민국(惠民局)등에도 의원이 있었다. 병제 가운데도 전옥에 의원을 두었으며 궁중에는 어약을 맡아보는 상약국이 있었다. 또한 태자와 관계된동궁관에 약장랑과 약장승이 있었다 태의감은 달리 전의서라고 하였으며, 의료정책을 맡아보는 문관출신의 판사,감,소감과 승,박사, 의생, 조교, 주금박사, 의침사, 주약, 약동, 주금공, 주금사가 있었다. 이 가운데 주금박사와 주금사, 주금공 등은 외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의학교육과 진료, 조제는 박사 이하의 관원들이 맡았다.

상약국(尙藥局)은 달리 상의국(尙醫局)을 비롯 봉의서(奉醫署), 장의서(掌醫署)라고도 하며 봉어를 비롯 시의와 직장, 의좌와 의침사, 약동 등이 있다. 이상의 내용들이 주로 왕이나 왕족, 관리들의 의료에 관계되었던 것이라면 상설기관이었던 혜민국을 비롯 동서대비원과 제위보, 비상설기관인 동서제위보감, 전제도감과 진제색이 있었다. 이 가운데 혜민국은 나라의 한약재를 서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 공양왕 때에 혜민전약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서민들과 관계된 진료업무를 맡았다 동서대비원은 개경의 동, 서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도성 내의 빈민을 비롯 병자와 고아, 노인과 기인 등을 구료하는 일을 맡았으며 사를 비롯 부사와 녹사 등의 관원들이 있었다. 비민과 기민의 구제와 관계되는 재원의 관리를 목적으로 광종 때 설치되었던 제위보는 임시기관의 성격을 띠고 특정한 질병이 유행하거나 기근이 들었을 때마다 구제를 맡았으나 결국은 유명무실해져 없어졌다. 또한 지방에도 나름대로의 의료제도가 있었는데 대도호부와 중도호부에는 구품에 해당하는 의사를 두었으며 목과 군에도 의학이란 관직을 두었다 천정이 넘는 주, 부, 군, 현에는 약점사 4인, 오백정이 넘을 때는 2인, 백정이 안 될 때는 1인을 두었다. 광종 때에 후주사람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한 후 광종 11년(960)에 의업과거를 치뤘다. 시험과목은 의업과거가 갑을경을 비롯 본초경과 소문경, 맥경과 침경, 난경과 구경, 명당경, 침경, 본초경은 물론 창저론 등이었다 이러한 의업과거의 실시는 결과적으로 의학교육을 활성화시켰다. 중앙에는 서경과 마찬가지로 의학원을 두었으며 12목과 3경,10도에는 의학박사를 두어 의학을 배우게 했다 특히 성종 때에는 의학을 권장하였으며 성종 1년(982)에는 주, 군, 현,의 영재들을 개경에 모아 일정기간 공부 시킨 후 귀향시켰다. 성종 2년(983)에는 다시 이들 가운데 의학에 능통한 학생들을 선발, 12목의 의학박사로 활용하기도 했다 한편 공양왕 1년에는 한의학 교육을 전의시에서 맡아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한의학

 

현대한의학의 발전수준이 조선시대에 결정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조선시대의 한의학은 흥성기를 맞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 한의학의 중요한 특징은 아무래도 각종 한의학서적의 편찬을 비롯 의료제도의 정비와 실용, 실증한의학의 발달 등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의 한의학은 초기에는 고려시대 한의학의 전통을 계승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선시대의 색깔을 띠게 되었다. 의료제도가 정비되면서 일기 시작한 일련의 변화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의 난리를 비롯 자연재해의 다발, 세종 때의 한의학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한 분위기등과 맞물려 결과적으로 한의학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란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하거나 각종 자연재해로 인해 생긴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한의학의 발전이 필요했으며, 한의학을 장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와 관련된 연구성과의 하나로 한의학서적들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의료제도의 경우 고려 때 있었던 의료제도를 활용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관들이 설치되었다. 왕이 있는 중앙은 물론이고 지방에도 의료기관이 존재했으며, 헐벗고 굶주린 일반 민중들과 상대적으로 홀대받아 왔었던 부녀자들이 치료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의료제도를 실시하였다. 먼저 중앙에는 내약방(內藥方)과 전의감(典醫監),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과 혜민서(惠民署), 제생원(濟生院)과 종약색(種藥色), 의학(醫學) 등이 있었으며 지방에는 의원을 비롯 의학교수(醫學敎授)와 의학교우, 의학원과 의학승 등을 두었다 이 가운데 내약방(內藥方)은 왕실에서 쓰는 약을 맡아보던 곳으로 세종 때에 내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전의감(典醫監)은 나라의 의료행정 모두를 맡아보는 한편 의학과 관련된 교육과 의과시험 등도 다루었다. 혜민서는 일반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동서대비원은 도성의 환자 가운데 무의탁자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았는데 태종 14년(1414)에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으로 바뀌었다. 제생원은 혜민서와 마찬가지로 일반 백성들의 치료를 맡았으며, 부녀자들의 치료를 위한 의녀제도도 실시했다. 의학시험은 잡과에 속하여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로 치루었으며 시험과목은 찬도맥과 동인경을 비롯 직지방과 득효방, 부인대전과 창집집, 태산집요와 구급방, 화제방과 본초, 경국대전 등이었다.

실시 시기에 따라서는 지지(地支)가 자(子), 묘(卯), 오(午), 유(酉)인 해마다 실시한 식년시(式年試)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그를 기념할 목적으로 치루었던 증광시(增廣試)로 나누어졌었다. 대체적으로 초시(初試)에는 18인을 뽑았으며 복시(覆試)에는 최하 1인에서 최고 9인까지 선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의학을 권장하는 방법의 하나로 태조 2년(1393)에 의학교수 1인씩을 각 도(道)에 보내어 향약혜민방(鄕藥惠民方)을 익히게 하였으며, 이와 함께 각 도(道)의 감사들을 시켜 가도에 보낸 의학교수들의 능력을 살펴보고 하게 했다. 특히 태조 때에는 한의학의 독자성의 확보란 측면에서 향약의 재배와 이용을 장려하기 위해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간행하였다.

 

 

이러한 한의학과 관련된 육성책들은 세종이 시작했던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 작업 - 임진왜란이 일어난 혼란한 상황속에서 탄생한 동의보감, 16세기 이후에 시작된 실증, 실용의학의 산물인 제중신편(濟衆新編), 광제비급(廣濟備急), 마과회통(麻科會通)을 비롯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 그리고 19세기에 간행된 독창적 한의학설서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으로 이어지면서 한의학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세종은 향약(鄕藥)과 당약(唐藥)을 비교 연구하도록 지시하고 약효가 뛰어난 향약을 권장함으로써 이른바 향약을 중심으로 한새로운 본초학을 등장시켰다. 이러한 활동을 집약시킨 것이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었다.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은 같은 한약재라고 하더라도 채취하는 시기와 건조하고 저장하는 방법 등에 의해 약효가 다르다는 생각 아래 적당한 한약재의 채취시기를 규정하였다. 또한 이미 편찬, 간행되어 사용되었던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수정, 보완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간행하여 약재의 자급자족을 꾀하였으나 명나라의 의학을 수입하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세종 즉위 25년(1443)에 의과 집현전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나라가 입수한 외국의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의방유취(醫方類聚) 365권의 원고를 집필하게 하였으며 성종 8년(1477)에 간행되어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방대한 의학백과사전으로 자리 잡고 있으나 현재 일본의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밖에도 본조경험방(本朝經驗方)을 비롯 산서(産書)와 식료찬요(食療纂要), 촬요신서(撮要新書)와 침구택일편집(鍼灸擇日篇集), 태산요록(胎産要錄) 등의 한의서가 발행되었으며, 세조 이후에는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을 비롯 구급방(救急方)과 마의서(馬醫書), 양화소록(養花小錄)과 의문정요(醫門精要), 의약론(醫藥論)과 창진방(瘡疹方)등의 간행이 이어져 조선시대 한의학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과 같은 한의서는 그 당시에 실증과학적인 법의학서로 변사사건의 재판에 활용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이러한 한의학들은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선조 30년(1597)에 발생한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버렸으며 고려시대의 한의학서들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타버리지 않은 많은 한의학서들도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빼앗기는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한국한의학사에 영원히 기록될만한 한의학서가 간행되었으니 이 책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선조(先祖)가 자신이 즉위한지 29년(1596) 되는 해에 허준에게 한의학을 총정리하는 한의서의 편찬을 지시함에 따라 김응탁을 비롯 양예수와 이명원, 정예남과 정작등과 함께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정유재란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그뒤에 허준이 작업을 계속하여 광해 2년(1610)에 완성을 보았다.

 

이 책은 기존의 일부 한의서에 포함되어 있는 추측이나 상상에 의한 일방적인 의견을 빼내버리는 한편 독자적인 의견을 빼내버리는 한편 독자적인 병인, 병리론에 따라 실증, 실용적인 내용만을 기록하였으며, 서명도 현재의 한의학과 상통하는 동의란 말을 넣어 동의보감이라 했으니 이는 이름 그 자체에서부터 중국의 의학과 구별을 함으로써 조선만의 독자성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풀이 된다.

동의보감 이후의 조선시대 한의학을 이야기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6세기에 일어난 실증의학과 영조와 정조 때에 시작된 문예 진흥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실용의학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대두되면서 실증의학과 관련된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등의 한의서가 간행되었다. 마마의 치료와 관계된 약방문을 모은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은 박진희가 편찬한 책이며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은 박렴과 이석간, 채득기, 허임 등이 자신들의 경험방을 중심으로 지었다.

허임(許任)이 자신의 임상경험을 종합해 편찬한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은 인조 22년(1644)에 1권 1책으로 간행되었으며, 서명에 보이는 것처럼 침구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실증의학이 일반화된 이후 실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론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실용의학이 본격화되었으며 이를 주도한 계층은 의관이 아닌 이헌길과 조정준등의 의인(醫人)이었다. 또한 이 때에 간행된 의서는 광제비급(廣濟備急)과 급유방(及幼方), 마과회통(麻科會通), 제중신편(濟衆新編)등이다. 이 가운데 광제비급(廣濟備急)은 이경화(李景華)가 함경도지방의 의료혜택을 넓히기 위해 간행한 것으로 지방에서 간행된 대표적인 한의서라는 사실 때문에 주목 받고 있으며, 조정준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아과의서인 급유방(及幼方)은 중국의 의서를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새롭고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약용이 지은 마과회통(麻科會通)은 마진과 관련된 과학적인 치료법을 적고 있으며 제중신편(濟衆新編)은 동의보감등을 참고하는 한편 약성가등을 새로 수록하는 등 실용성이 높아 의인들 사이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이밖에도 철종 6년(1855)에 황도연에 의해 완성된 부방편람(附方便覽)은 동의보감을 참고하여 여러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처방중 유용한 것만을 간추려 간편하게 만든 것이며 다시 이를 간추려 의종손익(醫宗損益)을 편찬했다. 아들인 황필수(黃泌秀)는 이러한 아버지의 저서들을 새롭게 편집하여 편찬, 방약합편(方藥合編)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에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편 19세기말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개화문물이 밀려오는 가운데 조선시대 한의학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 간행되면서 사상의학(四象醫學)이라는 새롭고 독창적인 한의학설이 출현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기존의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이나 육경변증론(六經辨證論)등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론이었던 까닭에 획기적인 저서와 학설로 평가받고 있으며, 같은 질병일지라도 체질에 따라 치료방법과 치료약도 다르게 써야 된다고 주장을 함으로써 인간개체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시초가 되었다.

 

 

1900년도 전후의 한의학

 

1990년대의 한의학은 일제강점기의 한의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조선은 고종 12년(1875) 일본의 무력에 의해 조용히 닫혀만 있었던 나라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 등도 개항을 요구하는 등 전혀 예상도 못했던 서양의 문물이 밀려들어왔으며 미처 적응하지 못했던 우리들은 주체적으로 수용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은 한의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어지러운 정황속에서 치료도구와 치료방법 등 전반적인 모습이 판이하게 달랐던 서양의학과 맞부딪힌 한의학은 바람앞에 선 등불처럼 일종의 위기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고종 14년(1877)에는 부산을 비롯해 인천, 원산에 한국인까지를 진료대상으로 하는 제생의원(濟生醫院)등이 설치되었다 게다가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온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일반서민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으로 의료를 선택함에 따라 한의학은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이 알렌의 외과적인 치료를 받아 민영익의 질병이 없어지자 서양의학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부의 개화론자들은 상대적으로 한의학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민족의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을 홀대하였다.

그 결과로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가 없어졌으며 광혜원(廣惠院)이 설립되어 알렌이 의료를 맡게 되었다

조선 고종 13년(1876)에 일본에 갔던 박영선이 일본 동경 순천당의원에서 우두종법을 배우고 종두귀감이란 책을 가지고 왔다. 이 우두종법과 종두귀감은 제자인 지석영에게 전달되었으며 지석영은 두묘와 종두침을 이용해 우두종법을 실시하였다. 조선 고종 31년(1894)에 이루어진 갑오개혁으로 정부기구가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어지면서 의정부 내무아문의 위생국에서 의사행정과 일반인들의 치료를 맡아보게 되었으며, 왕실과 관계된 것은 내의원과 전의감에서 맡아보았는데 궁내부에 소속시켰다. 제중원은 재정난으로 인해 미국의 선교사들에게 맡겨졌으며, 내무행정을 맡아보던 내부가 관계하는 내부병원이 생겼다.

또한 조선 고종 28년(1891)에는 의과시험이 없어졌으며 궁내부의 내의원과 전의감에 서양의도 전의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부의 위생국장과 내부병원장에 전의출신 한의사가 임명되었으며 내부병원에 한약소와 양약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대까지만 하더라도 한의사들이 일반진료를 맡았다

하지만 러일전쟁이후 한의사의 배출을 제한하고 한의사와 양의사가 함께 일하던 광제원을 폐지하는 한편 대한의원에서도 한의사를 축출하였으며 의료업무 자체를 일본인들이 맡아봄으로써 우리의 의료는 서양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에 반발하여 대한제국 8년(1904)에 전의인 홍철보 등이 한의학 교육의 실시를 위해 대한의학교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한국 한의학의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는 일본의 압력으로 꺾이고 말았다. 문화적으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모든 작업을 시작했으며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한의학을 차별 및 탄압하였다.

출처 : 사오십대 쉼터
글쓴이 : 약방 감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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