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백과(山白果)·깨금·처낭이라고도 한다. 산기슭의 양지쪽에서 자란다. 높이 2∼3m이다. 새가지에 선모(腺毛)가 있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인데 겉에는 자줏빛 무늬, 뒷면에는 잔털이 나고 가장자리에는 뚜렷하지 않으나 깊이 패어 들어간 부분과 잔 톱니가 있다. 잎 길이와 나비는 5∼12cm이고 잎자루 길이는 1∼2cm이다.
꽃은 단성화로 3월에 핀다. 수꽃이삭은 2∼5개가 가지 끝에서 축 늘어지며 수꽃은 포 안에 1개씩 들어 있다. 수술은 8개이다. 암꽃이삭은 달걀 모양이며 10여 개의 암술대가 겉으로 나온다. 열매는 둥근 모양의 견과이고 넓은 총포에 싸인다. 지름 1.5∼3cm이며 9∼10월에 갈색으로 익는다.
생약의 진자(榛子)는 열매를 말린 것으로 단백질과 지방이 많아 기력(氣力)을 돕고 위장을 튼튼하게 하는 데 사용하며 종자는 날것으로 먹는다. 한방에서 신체허약, 식욕부진, 눈의 피로, 현기증 등에 처방한다.
또한 이 열매를 커피와 함께 볶아서(덩치가 커피보다 크니까 슬라이스하여)분쇄하여 뽑으면 커피에서 개암 향이 섞여 아주 고소하고 감미료 향이강하게 나는 커피가 됨
열매는 식용하며, 열매와 수꽃 이삭은 부스럼, 단독, 습진, 화상, 동상, 젖앓이, 타박상 등에
외용하고 간염복수, 신염부종 등에 효험이 있다.
◆ 당질과 칼슘이 많은 개암은 오랫동안 게속해서 먹으면 위와 장을 튼튼하게 해주고 몸에 해롭지가 않다.
◆ 소화성이 좋은 탄수화물과 비타민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력을 돋우고 위와 장을 튼튼하게 해 준다.
◆ 밀가루와 설탕을 개암 겉에 발라 만든 개암사탕과 개암알을 넣고 담궈서 오래 두었다 먹는 간장(개암장)도 요즘 인기가 있다.
◆ 개암죽은 병후 회복제로 좋다.
영양성분 함량 : 단백질 19.8g, 지질 58.5g, 탄수화물 13.4g, 회분 3.6g, 칼슘 312mg, 인 784mg, 철 3.7mg.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관목.
잎은 어긋나고 잎가장자리는 약간 갈라졌으며, 갈라진 곳은 잔톱니처럼 되어 있다. 잎의 길이와 너비는 5~12㎝ 정도이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잎이 나오기 전 3월에 따로따로 피는데 수꽃은 작년에 만들어진 가지에서 밑으로 처진 꽃차례에 피며, 암꽃은 겨울눈처럼 생겼고 암술대만 꽃 밖으로 나와 있다. 열매는 9월에 갈색으로 익으며 도토리 깍정이처럼 열매 아래쪽이 총포에 감싸여 있다. 열매인 개암에는 지방과 단백질이 많이 들어 있으며 날것으로 먹으면 밤맛이 나고, 개암의 즙에 쌀을 갈아 넣어서 죽으로 먹기도 하는데 이 죽을 개암죽 또는 진자죽이라고 한다. 한방에서는 열매를 가을에 따서 햇볕에 말린 것을 진자라고 하며 이는 기력을 돕거나 위장을 튼튼하게 하는 데 쓰인다.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공주가 자신의 얼굴이 흉하게 된 다음 탄식을 하다가 죽었는데 공주의 무덤에서 난 나무가 바로 개암나무이고, 흉하게 된 얼굴을 감추기 위해 2장의 굳은 껍질 속에 자기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이 바로 개암나무의 열매라는 전설이 있다.
요즈음의 산에서 흔히 만나는 개암나무는 앞에 설명한 진짜 개암나무가 드물고
참개암나무가 더 많다. 참개암나무는 개암나무와 잎의 크기는 비슷하나 갸름한
달걀모양이며 잎의 윗 부분에 큰 겹톱니가 생기고 잎의 끝은 갑자기 꼬리처럼
뾰족해진다. 작은 받침 잎으로 열매를 감싸는 진짜 개암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옛날 그리스에 코리리포리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의 예쁜 얼굴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으며, 만약 자기 얼굴을 훔쳐보는 이가 있으면 죽인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호기심 많은 시녀가 세수하는 공주의 얼굴을 몰래 보다가 들켜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때 흘린 피가 공주의 얼굴에 튀어 공주 얼굴에는 지워지지 않는 붉은 기미가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공주는 애통하게 그만 죽고 말았으며, 그 후 공주의 무덤에서
개암나무가 자랐다고 합니다.
고려사 지(志)의 길례대사에 보면 '제사를 지낼 때 제 2열에는 개암을 앞에 놓고
대추, 흰떡, 검정 떡의 차례로 놓는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
연산 때까지도 밤과 함께 제수의 필수품으로 쓰였고 세금으로도 거둬들였다.
그 후는 개암이 제사에 쓰였다는 기록은 없고 중종.명종실록 등에 우박의 크기를
비교하면서 '작은 것은 개암이나 콩알만하다'는 내용 정도이다.
그나마 인조 4년(1626) 이후는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를 보아 오늘날 개암을
거의 쓰지 않은 것과는 달리 조선조 중기까지만 하여도 먹는 열매로서 널리
애용되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