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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한의 옛 모습들

by 따그니(화려한백수) 201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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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일본인 거리.
사진의 가운데 부분에 펄럭이는 일장기는 아마 평양역이 아닐까 추측한다. 
 
 일제강점기 평양 시장의 모습이다. 꽤 번화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6월 13일 평안남도 평양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는 모습. 
 
 1930년대 경기도 개성의 장날.
 
 
1930년대 개성의 부처님오신날 축제. 
 
 개성의 인삼밭 모습. 지금과 인삼 기르는 모습이 비슷하다.
 
 1930년대 경기도 개성의 덕물산 모습.
길을 따라 저기 앞서 가는 사람들은 일본인 민속학자들. 달구지에 땔감을 해 오고 있다.
오른쪽에는 물을 담아 놓은 논. 
 
개성 서대문의 모습.
길을 가다 쉬고 있는 나그네가 보인다.
 
함흥의 남대문 모습.
 
함흥 남문 밖의 모습.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 한가운데 짐을 실은 소달구지가 서 있다.
분위기로 봐서는 장터인 듯하다.
사진 왼쪽 병원 간판을 내건 가게 옆으로 더벅머리 청년이 지나간다.
 
 
함흥은 함경도의 중심도시로 함경남도 관찰부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도청 소재지였다.
본래 여진이나 거란이 발호하던 지역이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지만, 주변 평야에서
생산되는 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가 머물던 함흥 본궁.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긴 바로 그 장소.
 
 
함흥의 한 마을. 내에서 지게로 나른 푸성귀를 씻고 있다.
 
 
함흥의 만세교. 성천강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로,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조선 태조가 붙인 이름이라 한다. 1905년 러일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일본군이
1908년 다시 세웠으나, 1928년 대홍수로 유실되자 1930년 철근콘크리트로 건설했다.  
 
회령 시가지 모습. 회령은 함경북도 국경지역으로 조선 후기부터 청국과 무역을 하던 곳이다.
두만강 연안의 이 도시는 탄광 덕분에 빠르게 발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회령 시가지에
달구지들이 분주히 오간다.  오른쪽 산 중턱에 성문이 보인다. 전선줄이 하늘을 가른다.
 
헤르만 잔더가 성진과 길주 지역을 조사하면서 1906년 9월 16일부터 24일까지 여기 묵었다.
이곳은 함경북도 길주에 있는 동경관이라는 여관이다.
 
 성진에서 길주로 가는 길에 들른 생동 마을. 1906년 9월에 찍은 사진.
달구지에 잔뜩 실은 짐은 다 무엇일까?
 
 성진에서 길주로 가다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을 조사하는 모습.
말몰이꾼이 자기가 주인공인 양 환하게 웃고 있다. 1906년 9월.
 
 성진 지역에서 재배하던 조와 수수의 길이를 재고 있는 모습.
뒤에 건물은 성진 우편국, 지금의 우체국이다. 1906년 9월.
 
 헤르만 잔더는 함경북도 성진에서 손에 상처가 난 남자를 치료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남경세.
이곳은 수수밭이다. 그가 밟고 선 땅은 두둑.
헤르만 산더는 이 사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자기 손을 치료해 줬다고 나를 아버지로 삼고,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남자"
1906년 9월 24일.
출처 : 꿈과 희망쉼터
글쓴이 : 구본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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