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말기 및 대한제국 시대의 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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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동은전 |
대동전은 은으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화폐로서 상평통보와 같은 가운데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1882년(고종19년) 7월에 발행되어 3가지 액면으로 대동1전, 대동2전, 대동3전이 있으며, 뒷면에는 주전소인 戶曹에서 제조되었다하여 뒷면 가운데 원안에 戶字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또한 앞면의 글자는 對讀형식을 하고 있으며 압인이 아닌 주물형식으로 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평통보를 제조하는 기술과 비교하여 진일보한 기술은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뒷면 중앙에 칠보를 덮어서 새로운 화폐형식을 받아 들였다는데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칠보색상은 흑색, 청색, 녹색을 포함하여 5가지 색을 띠고 있다. 대동은전은 발행당시 주변국 일본의 일원은화, 멕시코의 무역화, 중국의 마제은 등 국가간 무역거래의 원활을 위해 은본위 화폐가 일반적인 분위기에서 조선정부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대동은전을 발행하였다. 대동전은 발행되자마자 은화의 본질적인 가치가 높고 은과 칠보의 아름다움 그 자체 때문에 부유층의 손에 들어가 사장되어 유통이 활발하지 못하였으며, 대동전의 소재인 중국의 마제은의 가격상승으로 결국 발행된지 9개월만인 1883년(고종20년) 6월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비운을 맞게 되었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수집선호도가 큰 화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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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오전 시주화 |
개항을 전후한 1883년경 생산된 상평통보 당오전은 당시의 어려웠던 국내사정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진 채 태어났다. 외국과의 교섭 및 개화를 위한 관리들의 일본파견, 신식부대 설치 및 운영비 등을 지출하는 것 외에 구식군대의 군졸들은 양곡과 급료를 1년여 동안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타개하고자 정부는 김옥균이 당오전 주조를 절대 반대함을 무릅쓰고 뮐렌도르프에게 당오전 지시를 명하여 1883년 전환국을 설치하고 주조하기 시작한다. 이때 발행된 당오전은 주물전과 압인전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전국의 주전소에서 주조된 상평통보는 대부분이 주물전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압인형태의 다양한 종류의 당오전이 있었는데 소전(素錢)가운데 원형이나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것과 구멍이 뚫리지 않고 원형 또는 사각형의 형태로서 구멍이 뚫리지 않고 윤곽만 가지고 있는 등의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평통보가 언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뮐렌도르프에 의해 독일에서 압인기가 수입된 1884년 을유시주화가 제조되기 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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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을유년 시주화 |
경성전환국이 설립될 당시의 화폐주조기술은 주물로 상평통보를 제조하는데서 크게 발전되지 못한 채 답보상태였다. 초보적인 기술에 의존하여 제조하던 화폐 기술은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주전설계서”라는 보고서를 고종에게 제출하면서 일대 변화를 맞는다. 보고서는 제출 되었으나 당시 미국 공사나 중국의 위안스카이를 비롯한 개혁자로 알려진 윤치호도 이를 강력 반대하였으나 고종은 주전설계서에 의한 대로 주전기계를 수입하는 결정을 내린다. 고종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883년 경성전환국이 설립되자마자 근대적 화폐제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 미흡으로 주화의 표면이 확연하지 못해서 조각담당, 각인담당 및 전환국관리자로서 총3명의 일본인이 초빙되었다. 이렇게 하여 1884년 (고종21년)에 최초로 시주화 2종류가 선보였는데 을유년에 제조되었다하여 을유시주화라 불린다. 한 종류는 1냥 은화로 또 다른 한 종류는 5문 동화로 제조되었다. 근대식 주화를 시험 제조한 이후 2년 뒤인 1886년에 15 종류의 다양한 시주화가 태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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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태극장도안 시주화 |
조선정부는 궁핍한 국가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1883년에 조폐기관인 경성전환국을 설치하였다. 전환국을 설치한 계기는 첫째, 개항과 더불어 무역을 위해 주변외국에서 사용하는 은본위제도의 화폐유통이 되고 있어 구 화폐체제인 상평통보보다 신식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둘째, 화폐를 제조하면서 수익을 창출하여 정부의 세수(稅收)확대를 시도하였다. 셋째, 경성전환국은 1884년(고종21년) 3월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전환국의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근대식 조폐기기와 더불어 소전(素錢)과 각인(刻印)도 독일에서 수입되어 근대식 화폐를 생산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추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86년 (고종23년)에 주석에 금과 은을 각각 도금한 금화 5종, 은화 5종 및 청동화 5종 총 15종류의 시주화가 탄생되게 되었다. 금도금화는 20환, 10환, 5환, 2환, 1환이 있으며, 은도금화는 1환, 5냥, 2냥, 1냥, 반냥이 있고 청동화는 20문, 10문, 5문, 2문, 1문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금보유량이 적고 제조비용 부족 등의 이유로 1888년(고종25년)주조를 중단하였다. 이후 이 기기는 인천전환국에서 계속 사용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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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최초의 근대식 태극장도안 통용화폐 |
1886년 최초의 근대식 시주화가 제조된 이후 2년뒤 정식법정화폐로서 모습을 갖춘 1냥, 10문, 5문의 3종류 주화가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통용화폐는 제조년도가 1886년 (개국495년)이라는 연호로 도안되어 있으며 도안은 전면 중앙상단에 태극무늬장휘장을 하였으며, 좌우에는 오얏나무 가지 2개를 서로 교차시키고 뒷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도안되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상징을 부각시켰다. 당시 발행량은 1환주화가 1300여매 그리고 10문 및 5문도 많은 량을 주조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할 수 밖에 없어 결국 대중 유통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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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은본위제도에서의 신식화폐 |
1891년 (고종28년) 전환국의 안경수의 건의를 받아들인 고종이 신식화폐조례에 대한 제정을 만들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화폐의 분량이나 성질이 정해진 것이 없어 이를 정한다. ② 화폐의 통용이 전국에 고르게 분포되어야 한다. ③ 화폐의 본위가 확립되지 않아 이를 정한다. 신식화폐장정에 따라 1892년 화폐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최저 1푼을 황동, 5푼을 적동, 2전5푼을 백동, 1냥과 5냥은 은으로 하기로 정하였다. 1냥 이하부터가 보조화폐로 1냥과 5냥은 본위화폐로 명문화하고 발행하였다. 1냥의 경우 국내에서 유통되도록 정한 반면 5냥은 외국과의 무역거래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였는데 당시 일본의 1원 은화와 동일한 가치가 있도록 정한데서 화폐의 주조는 물론 화폐가치 역시 일본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은 조선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청나라와 국내 보수파가 합세한 미국, 일본의 반대에 부딪쳐서 유통은 되었지만 신식화폐조례는 빛을 보지 못한 채 공포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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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금본위제도에서의 신식화폐 |
우리나라에서는 1901년 5월 22일 광무5년에 화폐조례가 제정되어 세계적으로 금본위 화폐제도 정책에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891년 은본위 화폐정책을 받아 들인 후 10년만의 변화이었다. 이렇게 하므로서 은본위 화폐제도에서 금본위 화폐제도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역할은 탁지부에 고문으로 와 있던 러시아인 알렉세이프의 조언에 의한 것이라 추정된다. 금화는 20원, 10원, 5원의 3종류이며, 은화는 반원, 20전, 10전이 있고, 5전 백동전과 청동화에는 1전 및 반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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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조례에는 20환, 10환, 5환의 금화 3종류를 본위화폐로 정했으며, 보조화폐로서 반원 은화와 20전 은화, 5전 백동화 및 1전 적동화로 정했다. 하지만 조례에 의한 화폐는 러일전쟁 영향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협정서을 한국과 체결하고 화폐정책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때 재정고문으로 취임한 메카타는 두돈오푼 백동화의 남발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화폐정책을 정착하기 힘들 것이라는 이유로 전환국을 폐쇄시키고 1905년 1월 18일에는 1901년에 제정된 화폐조례를 재정비한 “화폐조례실시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화폐종류를 보완 및 추가하여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10전 은화와 반전 적동화가 새로 제조되었으며 기존의 주화는 크기가 작아 진 것이 특징이다. 1907년 칙령 제4호로 은과 구리 등으로 제조하는 보조화폐 몇 종류가 크기 및 함유량 등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소재가치가 명목가치 이상으로 상승하여 주변국으로 유출될 경우 용해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이를 방지하고 화폐유통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서 였다. 1905년과 1907년에 발행된 주화는 메카타가 한국의 화폐제조권을 사실상 박탈하다시피 한 결과로 전량 일본의 오사카 조폐창에서 제조되어 한국에 유통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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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독수리도안의 화폐 |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종전보다 더 강경하게 조선의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강압에 의한 간섭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일본의 입장이 강해지면서 한국을 둘러싼 러시아, 중국 심지어는 프랑스와 독일까지도 일본을 견제하고 일본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일본의 오만불손한 행동은 극에 달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는 등 전국 각 지에서 의병들이 활동하는 등 전국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1896년 러시아와 친밀한 인사들이 러시아와 사전에 약속하고 아관파천을 실행에 옮겼다. 즉, 혼란한 사회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왕을 보호한다고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을 이동시킨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의 경제, 정치 사회 분야애서 입김을 강화시켰다. 또한 일본인이 주도권을 잡던 인천전환국을 폐쇄하고 용산에 전환국을 설치하여 한국에서의 화폐주도권을 가진 일본의 역할을 무력화 시킨 후 1901년에 반환은화, 백동으로 만들어진 5전 및 동화 1전을 러시아의 국장인 독수리를 소재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러시아의 세력이 약화되자 일본은 용산전환국을 폐쇄시킴과 동시에 독수리가 도안된 화폐를 대부분 회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가 용해시켰다. 힘이 없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일본 국왕의 상징인 용과 러시아의 휘장인 독수리 등으로 바뀌는 등 약소국가의 단면을 보여준 화폐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반환, 20환, 10환, 5환 4종류의 화폐가 용산 및 인천 전환국에서 시주화가 발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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