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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시대 각 지역의 혼례복"

by 따그니(화려한백수) 2011. 2. 8.

조선시대 각 지역의 혼례복"

 
[펌] 전통 혼례 혼례복 

전통적으로혼례식 때 신랑은 단령에 사모, 신부는 녹색 원삼이나 활옷에 족두리를 썼다. 이것은 조선시대부터 생겨난 결혼식 옷차림으로서양식 결혼식이 보편화된 요즈음에도 폐백 의상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옷차림이 원래부터 결혼식 예복으로 사용된 것은아니었다. 신랑의 옷차림은 조선시대문관과 무관의 관복이었고 신부의 예복은 공주나 옹주의 대례복이었다.
특히 원삼과 활옷이 결혼식 예복으로 허용된것은 조선 후기부터로, 경사스러운 혼례날 만큼은 신분의 차등없이 누구나 입을 수 있도록 한것이다.

 원삼이나 활옷이 허용되기 전까지 신부의 예복으로 사용된 것은염이였다.염의는 상하가 연결된 일종의 포로, 안에는 흰색 비단을 대고 겉감은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밑단에 선을 두른 예복이었다.

그러나 점차화려한 예복을 선호하게 되면서 원삼과 활옷이 염의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염의는 전통을 중시하는 일부 집안에서만 혼례복으로 착용하는 정도였다.그밖에 궁중 평상복인 당의도 서민들의 혼례복으로 허용되었는데 신분을 나타내는 금박문양이나 금실로 수놓는 보는 금지되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혼례복의 종류가 달라졌지만 조선후기 때부터결혼식 예복으로 정착된 것은 활옷과 원삼이었다.

신부의 예복이 시대변화와 함께 변천을 거듭한 데 반해 신랑의예복은 큰 변화없이 단령과 사모차림이 그대로 전해내려 왔다.

>> 신부의 혼례복

 신부의 혼례복은 일생에 한번 있는 경사에 기쁨을 표현하고신부를 최대한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목적 외에 부부금실과 지손의 복,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축원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오늘날 폐백복으로 입는전통혼례복은 한복 위에 간단하게 겹쳐입는 식이지만 본래 격을 갖춘 혼례복은 속옷부터 제대로 갖춰 입어야 했다.
 우선 가슴을 띠로 납작하게 졸라맨 다음 분홍색 속적삼을 입었는데이 속적삼은 계절에 관계없이 반드시 모시로 만들었다. 이는 모시의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에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올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듯 나쁜일은 모두 빠져나가고 한평생 속 시원하게 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속적삼에 받쳐입는 하의 속옷으로는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 단속곳을 순서대로겹쳐 입었는데 사대 부가에서는 무지개 치마와 대슘치마를 겹쳐 입어 겉치마를 더 부풀리기도 했다.
 

속옷을 갖춰 입은 후 위에는 노란색 바탕에 깃과 고름, 곁마기에자주색을 댄 삼회장저고리를, 아래에는 다홍색 치마를 입었다.
다홍색 치마에는 기쁨을 표현하고 액운을 막는 뜻이 깃들어 있었고 흙을 상징하는 노란저고리는 탄생과 새출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위에 염의나 원삼, 활옷, 당의 등을 겹쳐 입었는데 앞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원삼과 활옷이 일반적이었다.

그 가운데 현재까지도 폐백 의상으로 사용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예복이 바로 활옷이다. 활옷은 남색 비단으로 만든 안감에 다홍색 비단으로 겉감을 댄옷으로 깃은 달지 않고 뒷고대를 박은 뒤 흰색 동정을 달았다.소매 끝에는 황색, 홍색, 남색의 색동을 달고 그 끝에 길고 넓은 흰색 한삼을 달았다. 또 옆자락은 트고 앞으로 여미어 입도록 만들었는데 뒷자락이앞자락보다20정도길었다. 활옷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옷 전체에 수놓은아름다운 문양이었다. 다홍색 바탕에 장수와 길복을 뜻하는 십장생 문양을 수놓고 등에는 이성지합, 만복지원, 수여산, 부여해와 같은 글자를, 양어깨에는 자손을 기원하는 의미로 동자를 수놓았다.

 활옷을 입을 때는 홍색 띠를 가슴 위로 둘러 뒤에서 매듭을지은 후 길게 늘어뜨렸고 소매 끝에 달린 흰색 한삼으로 손을 가린 후 가슴 앞쪽에서 교차시켰다. 머리는 쪽을 지고 큰비녀를 꽂았는데 봉황을 새겨넣은봉잠이 주로 사용되었다. 봉잠 또한 평상시에는 왕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비녀였으나 혼례 때만큼은 일반 부녀자도 사용할 수 있었다.

 큰비녀 양쪽끝에는 댕기를 말아 앞으로 늘어뜨렸는데 이것을 앞댕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머리 뒤에는 큰댕기(도투락댕기)를 고정시켜 원삼이나 활옷 길이보다 약간짧게 뒤로 늘어뜨렸다. 앞댕기와 큰댕기는 감과 색깔,문양을 통일시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는데 보통 자주색이나 검은 자주색 바탕에 금박이나 색실로장식을 했다.

이와 같은 장식은 활옷과 함께 혼례복으로 애용된 녹색 원삼의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활옷을 입을 때는 화관을, 원삼을 입을 때는 족두리를 쓰는 것이 격식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족두리가 사용되고 있다.화관은 족두리보다 더 화려해서 오색구슬로 꽃모양을 만들어 달거나 칠보로 장식을 하고 움직일 때마다 떨림이 있도록 나비와 꽃장식을 용수철로 부착시켰으며앞쪽에는 이마 위로 흘러내리도록 긴 술을 달았다. 족두리는 검은 비단천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구슬이나 칠보로 장식을 했는데 신부으 족두리에는역시 긴 술을 달았다.

그리고 양 볼과 이마 중앙에는 연지를 찍었는데 같은 재료를사용하되 ㅇ마에 바르는 연지를 곤지라고 했다. 연지곤지를 찍는 이유에 대해서는 액을 물리치기 위함이라는 것과 젊음이나 숫처녀임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는것 등 다양한 얘기가 전해내려 오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혼례복에 신는 신ㄴ발은 갖가지 수를 놓은 수혜와 구름무늬로 장식한 운혜였는데 이것역시 평상시에는 상류계급의 전유물이었지만 혼례식때는 서민들도 신을 수 있었다.

>> 신랑의혼례복

사모관대 역시 혼례날에만 특별히 허용된 문관과 무관의 관복이었다.발목까지 내려오는 포 형태의 단령을 입고 머리에는 사모를 쓰며 목화를 신는 것이 신랑의 전통적인 결혼예복이었다.

혼례복으로 입는 단령은 남색과 북청색이 일반적이었는데 신분에맞는 흉배를 각기 달았다가 고종 때부터 당상관과 똑같은 쌍학문양의 흉배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무소의 뿔로 장식한 서대를 둘렀다.

단령 안에는 모시적삼과 여름용 홑바지인 고의를 입고 평상복인바지와 저고리를 입었다. 격식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는 바지와 조고리 위에 도포를 입고 다시 단령을 겹쳐 입어야 했는데 평소에는 흰색 도포를 입지만혼례식 때는 청색을 입었다. 신랑의 혼례복은 신부에 비해 격식이나 장식이 적었다. 그러나 속적삼만큼은 계절에 관계없이 반드시 모시로 만든 것을입어야 했는데 이것은 신부의 속적삼을 모시로 만든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머리에 쓰는 사모는 흑색으로 만들고 뒤쪽에2개의 뿔을 옆으로붙였다. 그리고 관복을 입을 때와 마찬가지로 목이 긴 목화를 신었다. 목화는 흑색 바탕에 솔기와 가장자리에만 붉은 줄을 댄 것으로 공단이나 융으로만들고 밑창에 가죽을 대기도 했다.

 사모관대 차림을 한 신랑은 초례청으로 들어설 때 양손에 사선을들어 얼굴을 가려야 했다. 사선은 생사로 얇게 짠 사각형 헝겊 양쪽에 자루를 대어 손으로 쥘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부채였는데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외출할때 들고 다니던 것이었다.

이처럼 전통 혼례복의 특징은 평소에는 서민들에게 금지되었던 궁중이나 양반가의 복식을 혼례날에만 특별히 허용함으로써 백성들의신분상승 욕구를 충족시키고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혼례복식은 형편이 닿지 않아 마련하지 못할 경우에는 빌려서라도 입을 만큼 반드시 갖춰야할 혼례식 예복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화려한 신부의 예복과 위엄과 품위가 느껴지는 신랑의 예복은 혼례의 의미와 기쁨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합한옷차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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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의상 2005/01/17 15:28

marriage clothes 현구례(見舅禮)
신랑 부모의 집에서 모든 신랑 가족들에게 신부를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폐백의 절차와 유사하지만 그렇게 딱딱하지는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평민들은 축제나 특별한 날에는 밝고 화사한 옷을 입었지만 보통 때는 흰옷이나 감정이 절제된 옷을 입었습니다만, 결혼은 한 인간의 일생일대의 중대사이므로, 이 때만큼은 참석자들이 궁중 의상을 본뜬 의상을 입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의상 외에도 의전용 사모(紗帽)를 했습니다. 신랑은 검은 모자를 썼으며 신부는 절차의 반이 지날 때까지 베일로 얼굴을 가렸으며 머리에는 비녀를 했습니다.(상세 정보는 문화특집의 전통 의복을 참조바랍니다.)

신부의 복장
원삼(圓衫)
신부는 정성스럽게 만든 외투를 입었는데 소매는 손을 완전히 가리도록 길게 했습니다. 당시 궁중의 왕족들의 의상과 유사한 옷으로, 원삼이라는 이 옷은 안 쪽은 푸른 비단으로, 바깥쪽은 붉은 비단으로 지었습니다. 원삼 의 앞뒤에는 부귀, 장수, 우아함을 나타내는 꽃들을 수놓았으며, 굽이치는 소매에는 청, 황, 적 등의 색동을 넣고 끝에는 손을 가리도록 흰 헝겊을 덧대었습니다.

wonsam and daedae 조선 시대에(1392-1910) 활옷을 대신해 원삼을 입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신부들이 따라했습니다. 공주는 녹색 옷을 입었으며, 넓은 소매에는 종종 4-5가지의 색동과 흰 헝겊을 덧대었습니다.

대대(大帶)
홍색 공단에 심을 넣어 만들어 금박 무늬를 찍은 것으로, 활옷이나 원삼을 입은 뒤 앞가슴께에 대대의 중앙이 오도록 대고 양쪽으로 돌려 뒤에서 묶어 늘어뜨립니다.

족두리
족두리는 몽고의 여자들이 외출시 사용하던 모자를 따른 것으로, 족두리는 이 보다 작아 모자라기보다 일종의 악세사리입니다. 왕족들은 칠보 족두리를 했습니다.
용잠과 댕기
yongjam and daenggi 신부의 머리카락은 뒤로 바싹 당겨 목 뒤에서 묶었는데, 묶은 머리 사이에 용잠을 찔렀습니다.( 용잠은 긴 비녀로 끝단부에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음.) 도투락댕기활옷이나 원삼을 입을 때에 화관이나 족두리에 맞춰 머리 뒤로 늘어뜨리는 큰 댕기로 검은 자주색 비단에 자수와 칠보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말들었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오색실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앞 댕기는 쪽 찐 비녀에 감아 드리움으로써 족두리나 화관에서 어깨를 거쳐 웃옷까지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댕기로, 검은 자주색 비단에 꽃무늬를 금박으로 중앙과 양끝에 찍고 끝에는 구슬을 10개정도 꿰어 달았습니다.

당의와 화관
왕비, 공주 혹은 고위 관료의 부인들이 왕궁에서 간단한 행사를 할 때 입었던 옷이 당의입니다. 양반 집 규수들도 혼례 때는 당의를 예복으로 입었습니다. 당의는 통상 안쪽에 붉은 비단 바깥쪽에 녹색 비단을 사용했거나, 안쪽에 분홍색 바깥쪽에 자주색 비단을 사용했습니다. 당의는 소매가 좁고 끝단은 반달형입니다. 당의와 함께, 족두리와 유사하지만 훨씬 화려한 화관을 머리 장식용으로 썼습니다.

신랑의 복장
사모관대로 불리는 신랑의 복장은 조선 시대 궁중 최하위직 관료의 복장과 유사합니다. 복장의 색깔과 벨트의 장식은 궁중 관료체계의 계급을 상징합니다. 결혼은 일생의 가장 중요한 행사이므로 신랑은 궁중 관료가 아니더라도 이 복장을 입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고위 관료들은 혼례식 때 다른 복장을 착용했습니다.)

바지와 저고리

바지는 헐렁한 바지가 통이 좁은 바지보다 마루에 앉기 훨씬 편하므로 다리통이 넓습니다. 대님이라는 끈으로 바지 밑단을 발목에 묶습니다. 바지끝단이 장화 위를 덮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고리는 당시 남자들의 전통적인 상의입니다. (여자용 저고리와 명칭이 같습니다.)

단령포(團領袍)
원래 단령포는 궁중 관료들의 평상복입니다. 통상 청색이나 적갈색으로 가슴 부분 중앙에 2마리의 홍학을 수놓았습니다. 신부의 대대처럼 허리에 각대를 하였습니다.

신발은 목화라고 하는 천으로 된 검은 장화를 신었으며, 머리에는 사모(紗帽)를(양옆에 장식 깃이 달려있는 가파른 모자) 썼습니다.
출처 : [구-광릉수목원] 원문보기
출처 : 배움의장 쉼터 카페
글쓴이 : 조약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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