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시력 도둑’ 녹내장
'나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한 1950~60년대 흑인 솔 가수 레이 찰스와 세계적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공통점은 모두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위대한 이유는 뛰어난 음악 감성 못지않게 그 시각장애를 극복했다는 점일 게다.
눈은 인간이 세상과 소통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눈으로 유입되는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예술가로 성공하기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녹내장은 '조용한 시력 도둑'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지만, 질환에 대한 인식은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4500만 인구가 녹내장으로 실명했는데 이는 전체 실명 인구의 12%에 해당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발표에 따르면 2009년 국내 실명인구 약 70만명 중 38% 정도가 녹내장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당뇨병성 망막증(31.5%), 황반변성(12.9%)보다 높다.
이런 녹내장이 최근 한 TV 드라마에 나와 관심을 끈다. 병원에서 부모가 바뀐 이후 삶이 뒤바뀐 여성들이 가족의 사랑을 깨달아가는 이야기로 어려운 경제적 환경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어머니(극중 고두심)에게 녹내장으로 인한 실명 선고가 내려지면서 극적인 효과가 더해진 것이다. 드라마에 심취한 시청자들은 극중 배우와 같은 심정으로 녹내장을 만나고 있다.
녹내장 전문의 입장에서 질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반갑다. 하지만 질환에 대한 바른 정보보다 공포감이 먼저 조성될까 우려가 된다. 녹내장은 실명에 이를 수 있지만, 조기에만 진단해 치료하면 평생 시력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녹내장의 현실적인 문제를 짚어보자. 국내 녹내장 유병률은 약 3.5%로 전체 인구로 환산해 보면 약 175만명이 환자일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녹내장 치료를 받은 환자는 40만명 정도로 발병 환자 중 20%만이 치료를 받고 있는 셈이다. 녹내장에 대한 진단과 치료가 그만큼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녹내장은 사실 조기 발견이 어렵다. 발병 원인도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높은 안압이 녹내장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지만 우리나라 녹내장 환자의 77%는 안압이 정상이어서 이 때문만도 아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신이 녹내장인 줄 모르고 지내다가 시신경이 80~90% 이상 손상된 뒤 시야가 좁아지는 증상을 겪으면서 알게 된다.
녹내장을 조기에 발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눈에 이상이 없더라도 40세부터 일년에 한번씩 안과 검진을 받는 것이다. 녹내장에 걸리는 사람은 40대부터 1년마다 0.1%씩 늘어나 80대에 이르면 전체의 10%쯤 걸리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력이 있을 경우에는 좀 더 일찍 정기 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 녹내장 검진은 안압검사, 전방각경검사, 시신경검사, 시야검사 등이 있다. 치료는 높은 안압이 원인인 경우 안압을 낮추는 것이 치료의 목표가 되며, 약물요법과 레이저 또는 수술적 방법 등이 사용된다.
녹내장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질환이 아니고 그 안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에 녹내장 전문의의 진찰과 검사를 통해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찾아야 한다. 녹내장을 예방하는 음식과 생활 습관을 실천하는 것도 좋지만, 정기적인 검진이야말로 눈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드라마 속에서 실명 위기에 놓인 배우의 연기에 눈물만 흘리지 말고, 평생 건강한 눈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도록 정기 검진을 권고한다. 녹내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 진선영 건양대병원 안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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