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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귀신도 모르게 태어난 해병대 전차부대의 숨은역사

by 따그니(화려한백수) 2013. 4. 9.

 

 

 

귀신도 모르게 태어난 해병 전차부대

- 전 해병대사령관 공정식 장군

<제 1편>

판문점, 장단 및 도라산 전선에서 중공군 진격저지 격멸, 8년간 수도 서울 방어작전에 맹활약

북한 공산군이 1950년 6월 25일(일) 새벽 4시, 북위 38도선이 지나는 한반도 전(全) 전선에 걸쳐 전격적으로 기습 남침을 시작한 이래 벌써 6·25 전쟁 6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1950년대 초에 전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이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남한을 제외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대가였다.

당시 한반도의 중간을 지나는 35도선 일대에 걸쳐 남침하던 북한군 선두에 서서 서울을 향하여 진군해 내려온 것이 바로 북한 제105 전차여단과 각 북한군 사단이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T34 전차였다.

남침을 위해 소련이 원조한 T34 전차 200여대와 SU76 자주포 176대를 앞세운 북한군은 서울을 방어하던 국군 부대를 여유 있게 유린하고 기습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 뒤 연이어 벌어진 수원 남쪽의 오산 전투에서도 북한군 전차는 다시 한 번 위력을 발휘하여, 방어하던 미군 스미스부대를 전멸시키고 파죽지세로 남진하였다.

북한군 전차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에서, T34보다 화력과 장갑이 떨어지는 미군의 M24 사피(Cheffy) 전차대와 한국전쟁 처음으로 전차와 전차끼리 기갑전투를 벌여 미군 전차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사기가 오른 북한군 전차대는 계속 진격하여 미군 제24사단이 방어하던 대전을 점령했다. 대전을 지키던 미 제24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북한군 보병 사단의 선두에 서서 대전 시내로 돌입한 것도 북한 인민군의 기갑부대였다.

이와 같이 6·25 전쟁이 시작되자 전차를 선두로 한 북한군의 공격에 국군은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전쟁 초기 국군 부대의 와해와 패배, 그리고 전 국토의 90%를 잃고 낙동강까지 쓰라린 철수를 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바로 적의 전차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이와 비슷한 낭패한 전례가 있었다. 1940년 5월 팬저 전차 3,4호를 앞세운 독일 전차 부대가 난공불락의 프랑스 마지노선을 무참히 뭉개버린 사건이다.

프랑스는 이 패배 후 6주만에 항복하고 만다. 군사적인 부분만 놓고 보았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은 사상 최강의 전투능력을 보유한 군대로 평가될 만큼 뛰어났다.

독일의 자체 분석으로도 750km에 걸친 마지노선을 따라 프랑스 전투 병력이 분산돼있어 한 곳을 전차를 선두로 하여 집중 공격한 독일의 전격작전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역사엔 만약이 없지만 만약의 역사를 생각하는 건 현실을 사는 자의 특권이다.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될 때까지 3년 동안 유엔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음에도, 전쟁 초기 기갑부대를 앞세우고 낙동강까지 내려오는 적을 막을 수 없었다. 6·25 가 일어날 때 우리 국군은 전차는 한 대도 없고 장갑차만 39대(M8형 그레이하운드 27대, M3형 하프트랙 12대)를 보유하고 있던 우리 국군의 독립기갑연대는 북한군이 남침하자 전선을 향해서 용감하게 출동하였다. 그러나 적의 막강한 전차대와 그 화력에 제압 당하여 다른 부대와 함께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군은 1951년 10월부터 휴전할 때까지 M36 전차로 9개의 전차중대를 창설하여 전선에 주입하였으나 전선이 이미 교착된 상태이므로 기갑부대 고유의 기동돌파작전은 하지 못하고 제한적 기동을 하면서 아군 보병부대의 공격과 방어를 지원하는 임무만 수행하였다.

전쟁 당시 국군의 독립기갑연대는 이름뿐이었으며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전쟁 기간 전혀 전차를 보유하지 못했으므로, 국군과 북한군 또는 국군과 중공군(중공군도 전쟁 후반에 들어 대규모 T34 전차대를 투입하였음) 기갑부대의 전차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전차는 없었지만 국군의 육군 독립기갑연대는 전쟁 초기 얼마 되지 않는 장갑차를 가지고 북한군의 막강한 전차에 맞서다가 전멸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한국전쟁 후반부에 우리 육군은 9개의 독립 전차 중대를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전차가 아닌 M36 잭슨(Jackson) 전차(포탑 상부의 덮개가 없는)를 운용했던 것에 견주어 우리 해병대는 비록 1개 전차 중대였지만 M4 서먼(Sherman) 전차를 운용하였던 것이다.

한국 해병대 도솔산 전투 후 전차 등 지원병과 창설

한국 해병대가 전차 등 지원 병과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이를 증강시킨 계기는 도솔산 전투가 끝난 뒤 당시 해병대 1연대장 김대식 대령과 고문관 해리슨 중령, 그리고 대대장이던 필자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또한 미 해병대 역시 도솔산 전승을 통해 비로소 한국 해병대의 전력을 인정했을 뿐더러 그 동안 제지원병과 이를테면 포병 기갑 통신 공병 의무 수송 등의 직접지원이 절차상 번거롭다는 판단아래 한국 해병대의 증강과 자체 운용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해병연대와 더불어 야포와 전차, 공병 중장비, 의무와 수송 등이 증강되어 결국 서부전선에 이동할 때에는 제1전투단으로 규모가 격상되어 독립작전 수행이 가능한 부대로 변모하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우리 육군과 해병대는 1952년 말에는 중·고등학생을 모집하여 소년 전차병들로 구성된 전차부대를 창설하였는데 이런 내용은 아직도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1951년 6월, 해군본부는 각 신문에 자동차 운전병 모집 공고를 실었다. 이 공고를 보고 각지에서 지원병들이 몰려들었다. 전형을 거쳐 뽑힌 189명은 9월 10일 무렵부터 진해 통제부 안에 있는 해군 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뒤, 11월 1일 해군 자동차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주일 뒤 이 가운데 20명을 별도로 차출하여, 1951년 8월 25일 무렵 전차 한대도 없는 상태에서 이미 편성된 해병 전차중대에 보냈다. (당시 창설요원 중에는 중대장은 오상규(吳尙圭)대위 그리고 선임장교는 박효렬 중위, 육성환 소위, 지장우 소위 등이었다.)

그 후 해군 자동차학교를 해병대에서 인수, '해병 기갑학교'로 개창하게 되었다. 초기에 차출된 20명은 비공식적으로 기갑학교 1기로 불렸고 12월 초에는 신병 12명을 보충 받아 전차중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들은 12월 중순 부산의 부전역에서 미군으로부터 76mm포를 가진 M4A3 전차 5대를 넘겨받음과 동시에, 50여 명의 해병 전차중대 요원은 중앙선 열차 편으로 원주를 거쳐 강원도 양구군 해안명에 있는 미 해병 제1 사단 전차대대 근처에 배치되었다.

당시 이 곳 펀치볼은 최전선으로서 해병 전차 중대원들은 아군과 적군이 전투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1952년 1월 28일부터 실제 전차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높이 1,200m 안팎의 고지 능선에 오목하게 형성된 분지(남북 7.5 km, 동서 5.5 km)이므로,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화채그릇처럼 보였다. 그래서 한 종군기자가 이 동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를 '펀치볼(Punch Bowl ; 화채 그릇)'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미 해병대 전차 교관(대위)은 이전에 중국 장개석 군대의 전차병도 훈련시킨 경험이 있었으므로, 펀치볼에서 해병 전차중대원을 교육시키기 전에는 해병대보다 장개석 부대의 전차병의 수준이 더 높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교육을 시작하고 보니 우리 해병대 병사들이 교육을 더 잘 받아들여 놀랐다고 한다.

50명은 전차 탑승 요원(30명), 전차 장비(10명), 전차 통신(10명)으로 나뉘어 실전 교육을 받은 뒤, 3월에는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 영태리로 이동하여 5월 3일 교육이 끝나는 날, 미 해병대로 부터 영어로 된 수료증을 받았다. 당시 창설요원 박효열 중위의 교육관련 수기다.

특히 감명을 받은 것은 교관이 강의시간 중에 "M-4 전차는 적의 야포탄을 맞아도 파괴되지 않는 강한 전차다. 전차가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이 전차를 운용하는 군인의 정신이 강해야 된다. 만일 이 전차의 탑승병이 용감하지 못하여 적 앞에서 도망한다면 이 전차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탑승병이 전차를 버리면 이 전차는 고철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과연 미 해병들의 정신은 일본군의 정신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기억이다.

1956년 일등해병(상병)으로 제대한 정영섭은 당시 전차 정비교육을 받았는데, 군 입대 전에 만주에서 포드트럭 엔진을 정비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는 M4A3 전차의 포드엔진 정비를 쉽게 배웠다고 떠올렸다. 교육을 끝낸 전차중대는 미 해병부대로터 M4 전차 15대를 추가로 받아 기존에 있던 5대와 합하여 20대의 전차로 1952년 5월 경기도 개풍군 장단면 수전포로 이동, 6월부터는 도라산 및 임진강 장단지구 전투에 투입되어 수도 서울을 지키는데 큰 몫을 하였다.

그 당시 해병 전차중대는 전차포탑 한쪽에는 한글로 '해병'이라고 쓰고 다른쪽엔 영어로 한국 해병대(Korea Marine Corps)의 약자인 'KMC'라고 써 놓았다.

다음해인 1953년에는, 복구용 전차 2대와 화염방사 전차 1대도 미 해병대로 부터 넘겨받았다.

해병대는 화염방사 전차를 영어 그대로 '후레임(flame) 탱크'라고 불렀다. 포탄의 경우도 일반 포탄은 영어 그대로 '에치이(HE)탄' 이라 부르고 철갑탄은 '에치브이(HV)탄' 이라고 불렀다.

한편, 육군이 소년 전차병을 모집할 때와 비슷한 시기에 해병대도 17~19세 사이의 소년 전차병 88명을 모집하여 1952년 8월, 경상남도 진해에서 소년 전차병 제1기 교육을 시작하였다.

교관은 모두 우리 해병대원이었으며 교육 기간 동안 전차는 한 대도 없이 이론 교육만 하였다. 원래 신문 모집 공고에 낸 대로, 미국 본토나 오키나와에 있는 미 해병대 기지에서 교육을 한 뒤 이들을 교관 요원으로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전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이들 소년 전차병들은 신병 교육 3개월, 특수교육(수송·통신) 4개월 훈련이 끝나면서 모두 자대 배치되었다.

해병대의 소년 전차병 제도는 제1기만 배출하고 중단되었다. 휴전이 되자 각 부대에 배치되어 있던 소년 전차병 제1기 출신들을 다시 모아서, 해병 전차중대는 전차대대로 확장되어 창설되었던 것이다.

<제 2편>

해병 전차부대 수도서울방어작전에 맹활약

1952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된 해병 전차중대는 전차 3개 소대와 정비반 정비 전차(복구 전차), 통신반, 근무소대, 중대본부, 중대장 전차, 선임 장교 전차로 편성되어 서부 전선 판문점 동남쪽 장단지구에 배치 되었다.

당시 해병 제1전투단의 주저항선(MIR)은 사천강 하류에서 판문점까지였으므로, 해병 전차중대는 지금의 임진강 자유의 다리 건너 155고지(도라산 전망대)를 중심으로 사천강 하류 전초 진지까지 넓은 지역을 맡아 해병부대를 기동과 화력으로 지원하였다.

7월에는 사천강에서 중공군 보병 1개 대대가 도강하는 것을 3소대 소대장 김세환 소위와 명태호 선임하사가 발견하고, 전차포로 집중 사격하여 중공군 대대 병력을 격파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전차중대 정영섭 상병이 탄 전차는 1952년 여름, 155고지 북쪽 2km에 있는 67고지를 지나가다가, 중공군 시체 10여구가 길가에 늘어져 있어 전차를 세우고 승무원들이 시체를 길가로 옮겨 놓았다.

전투 상황에서 전차를 세우고 승무원이 전차에서 내리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지만, 아무리 적이라도 인간적인 마음에서 도저히 시체를 짓뭉개며 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영섭 상병은 155고지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절하고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의 오른팔에는 아직도 상흔이 있고 조그만 파편이 들어있다.)

싸울 때는 전사(戰士), 그러나 휴머니스트 해병

이렇듯 싸울 때면 우리 해병들은 용맹스러운 전사(戰士)였으나 평시에는 인간적이며 인도적인 젊은이로 해병들은 따뜻한 휴머니스트(Humanist)였다. 전우를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렸고 특히 사자(死者)에게는 인간적인 관용을 베풀어 명복을 빌었다.

전차중대의 정영섭 상병의 이러한 휴머니스트로서의 해병들의 실화는 그 해 9월에도 여러 곳에서 이어진다.

해병 제1전투단이 보병기갑연합작전을 개시하여 36고지를 재탈환한 9월 20일 오후 2시경, 해병 3대대 위생하사관 정용해 하사는 부상자와 시체 후송에 나섰다.

한쪽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가 된 중공군 소년병이 눈에 뜨이자 그는 대형 압박붕대로 상처를 감싼 다음 그를 들쳐 업었다.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엠블란스와 트럭이 대기하고 있는 지점(LD후방의 집결지)까지 정 하사는 힘겹게 걸어 나왔다. 그러나 정 하사는 들쳐 업고 온 그 소년병이 숨을 거두는 바람에 전신의 맥이 확 풀리는 듯한 허탈감을 느끼며 잠시 논두렁에 기대 앉아 화랑담배 한 개피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그는 탄약작업소대장이 타고 지나가는 트럭을 보고 벌떡 일어나 트럭 운전석으로 뛰어가 옆자리의 이해인 소위에게 중공군 소년병 시체가 있으니 차에 싣어 주기를 침통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이해인 소대장은 지금 긴급한 상황에서 무슨 소리냐고 반박했다.

" 소대장님, 죽은 자는 더 이상 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죽은 중공군 소년병도 우리 해병 전우들과 똑같이 차에 싣고 가시지요."

그의 말에 공감하게 된 이 소위는 "네 말이 옳아, 죽은 자가 어찌 적일 수 있겠나"하며 중공군 소년병 시신을 트럭 위에 싣게 했다.

비록 죽어버린 시신(屍身)이었지만 사자에게 정중한 예를 다하는 것이 인간지사다. 동물적인 야성(野性)이 지배하는 전쟁터였지만 바로 정용해 하사와 같은 휴머니스트 해병들이 인간의 도리를 많이 보여주었다.

전차중대의 포사격 지원

중공군은 9월 추석날 보름달이 뜰 때 대공세(추계 대공세)로 나와 아군 주저항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이때 해병 전차중대의 전차들이 도라산 및 장단 사천강 방어선에 횡대로 늘어서서 돌진해오는 중공군에게 집중 포사격을 퍼부어 그들을 격퇴하여 한국 해병대의 진가를 발휘하여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었다. 도라산 155고지는 사천강 남쪽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서 해병대 제1전투단의 전방 OP고지로 널리 알려졌다. 꼭대기는 적의 포탄이 하도 많이 떨어져 포탄 때문에 흙먼지가 1m나 쌓였다.

중공군은 낮에는 미군 항공기를 겁내어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피리를 불거나 꽹과리를 치면서 공격하였다. 여기에 대비해 해병 전차중대는 낮에 탄착점을 미리 외워두었다가 중공군이 야간에 공격해 올 때 그 지점을 사격하였다. 밤새 사격을 하다보면 포탄과 기관총알이 바닥났고, 이때는 트럭으로 탄약을 공급받거나 전차를 이동하여 중대본부로 내려가 탄약을 싣고 다시 고지에 올라와 사격하였다.

미 해병대의 항공지원이 필요할 때는 해병 전차중대에 파견된 미 해병 고문관에게 요청하면 미 해병대 전투기가 곧 상공에 나타났다. 항공 근접지원은 미 해병대 콜셰어 전투기의 지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미 공군전투기보다 미 해병대 소속 콜셰어 전투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저공으로 날아와 적의 목표물을 완벽하게 타격하였다. 콜세어 전투기의 미 1해병대 조종사들이 우리 해병 전차부대의 상공을 낮게 날아 동체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손을 흔들어 줄 때는 우리 해병 전차병들의 사기도 더욱 충천하여 힘차게 손을 마주 흔들었다. 국적을 떠나 같은 해병대라는 교감이 서로 오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우리 해병대와 미군 해병대는 합동작전으로 중공군의 거듭된 인해전술을 장단지구 사천강에서 성공적으로 격퇴하였고, 여기에는 해병 전차부대의 활약이 큰 몫을 했다.

1953년 5월 무렵, 적이 임진강 상류 연천 지구의 노리고지, 베티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자, 해병 전차부대는 이를 방어하는 육군 제1사단 예하 제11, 제12, 제15연대에 화력 지원을 하였다.

이때 함께 지원에 나선 육군 전차중대의 M36 전차의 경우 무한궤도의 폭이 좁아 급경사는 잘 오르지 못했으나, 해병대의 M4 전차는 급경사도 잘 올라갔기 때문에 육군 제1사단에 화력지원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육군 전차 중대 소속 M36 전차가 가파른 언덕길을 제대로 오르지 못할 때는, 해병 전차 부대의 M4 전차가 견인해 고지 정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해병 전차부대가 전진할 때는 앞서서 해병 공병중대가 지뢰탐지기로 지뢰를 찾아냈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뢰를 전차가 밟을 때도 있었다. 이 경우, 무한궤도가 부서져 전차는 정지하게 되는데, 멈추자마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중공군의 박격포탄이 전차 주위에 맹렬하게 떨어졌다. 박격포탄은 전차에 명중하여도 포탑이나 차체에 손상을 주진 못하였으나 전차 뒤쪽 엔진 상부의 격자판(格子板)에 정확하게 떨어지면 화재를 일으켰다.

이런 경우, 견인 크레인이 달린 복구용 전차가 야간에 은밀하게 투입되서 부서진 전차를 후방으로 끌어내는 작업을 했다. 주간에는 적의 사격이 심해 야간에 끌어냈는데, 새벽 2시에 끌어낸 전차도 있고 5일 만에 간신히 끌어낸 경우도 있었다. 끌어낸 전차는 부서진 정도에 따라 간단한 것은 20분만에 수리하고 심한 것은 며칠씩 걸렸다.

당시 전차중대장이였던 박효열 대위의 수기다.

전투가 치열하게 밤낮 없이 계속되니까 미 해병 연락장교인 타부리 중위는 지프차 트레일러다 자기 짐을 잔뜩 실어놓고 언제든지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타부리 중위를 불러서 "짐을 다 실어놓고 본대(미 해병 전투대대)로 가려는가?"하고 물었더니 그런게 아니라 전세가 하도 위험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고 대답했다. 나는 필사적인 결의로 말했다.

"여보시오 당신도 알다시피 임진강의 다리는 하나밖에 없소, 우리 해병이 다 죽는 한이 있어도 현 전선은 고수할 것이요. 만일 작전상 상급사령부에서 일시 철수하라고 한다면 보병부대가 우선적으로 다리를 건너고 그럴 경우 나의 전차중대는 끝까지 남아서 부대의 철수를 엄호해야 될 것이요. 그리고 우리나라는 당신네 미국같이 부자가 못되는 만큼 이 전차를 버리고 맨몸으로 후퇴할 수는 없소. 당신이 우리 중대의 연락장교로 있는 한 죽든 살든 나하고 생사를 같이 할 책임이 있는 것 아니요?"

그랬더니 "박 대위 잘 알겠소"하고 나가서 다시 짐을 모두 천막 안으로 들여다 놓았다. 그리고는 타부리 중위는 매일같이 내 방에 와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미 해병대 고문관은 전차가 지뢰를 밟으면 그냥 버려두고(또 보급될 테니) 몸만 빠져나오라고 했으나 당시 전차 한 대가 3억환(당시 화폐)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제3대 해병 전차중대장 조의정 대위 휘하 전차중대원 모두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어떻게 해서라도 전차를 끌어내어 수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병 전차중대는 미 해병대로부터 인수한 전차 20대를 휴전이 될 때까지 한 대로 잃지 않고 운용하였고, 전차대대로 증편되었다.

중공군의 T34 전차도 85mm 전차포탄을 아군 진지에 쏘아댔다. 한국전쟁 초기에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은 은밀하게 참전하느라고 야포나 전차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전선에 정체를 드러내고 부터는 야포와 전차도 들여왔다. 1952년 초에는 이미 중공군 2개 기갑사단이 보유한 T34 전차 520대가 전선에 배치되었다.

이 즈음 중공군은 전선에 8개의 포병사단을 운용했고, 만주에는 1,250대의 소련제 항공기(주로 전투기)도 배치하여 병력 증강과 함께 장비도 현대식으로 크게 개선하였다. 그러나 중공군 전차대는 제공권을 쥐고 있는 미군기가 겁나서 주간에는 나뭇가지를 전차 위에 덮어 위장하고 있다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해를 등지고 나타나 국군 진지에 포탄을 쏘아대고 신속하게 도망하곤 하였다.

서쪽에서 공격해오는 중공군은 석양을 등지고 있으므로 햇빛 때문에 아군이 관측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런 공격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군은 나뭇가지로 위장한 중공군 전차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고, 적이 전차포를 사격할 때 마다 번쩍이는 불빛만 보일 정도였다. 이런 중공군 전차대의 공격법에 맞서 동쪽에 위치한 해병 전차부대는 아침(오전 9시 이전)에 태양이 솟아오를 때를 이용하여 중공군 진지에 전차포 사격을 하였다.

전쟁 초기에 북한군 전차에 아군 전선이 유린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서 해병 전차부대는 공산군 전차와 반드시 전차전을 치르고 싶었으나, 미 공군기를 두려워하는 공산군 전차가 대낮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해병 전차부대는 T34 전차에 복수전을 펴지 못하고 휴전을 맞았다.

아군은 제공권을 이용하여 , 낮에 항상 상공에 떠 있는 미 해병대 L19 연락기가 적진지의 목표물을 관측하고 연막탄을 쏘면 곧 미 해병 전투기가 나타나 목표물을 공격하였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위해 사전에 약속을 하고 아군 진지에 설치해 놓은 대공판 색깔로 미군기는 오폭(誤爆)을 방지하고 적군만 공격하게 되는데, 미군기가 나타나면 공산군도 즉각 대공판을 아군과 같은 색깔로 바꾸었다.

국군에 침투한 스파이나, 관측을 통해 공산군도 그때 그때 아군의 대공판 색깔을 알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미 해병대는 적의 이러한 술책을 간파하여 잘 대응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수도 서울을 탈환한 한미해병대로 하여금 서울을 지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밴프리트 유엔군사령관에 의해 해병 제1전투단은 서부전선의 요충지인 도라산, 장단지구전선에서 임진강을 배수진을 하여 중공군 19병단 예하 65군단 193, 194, 195사단의 중공군 4만 2000명을 상대하여 해병 1개 전투단 5,500여명의 병력으로 1952년 3월 17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정협정 때 까지 1년 4개월 10일(495일)간 피아간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며, 수도 서울을 사수 한 것을 우리 해병들은 우리국민 특히 서울시민들에게 보답한 보람으로 여기며 큰 자랑으로 생각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맞았으나 정전 후 해병여단 증편을 거쳐 55년 1월 15일 파주군 금촌면에서 해병 제1상륙사단으로 증편 되었으며, 그 후 59년 3월 12일 포항으로 이동할 때 까지 무려 8년 간을 적과 대치하면서 수도 방어라는 중책을 완수하였으며, 한편 해병 전차대대는 기동과 화력으로 공격과 방어를 지원하고 전과를 확대하여 해병사단 수도방어 작전수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출처 : 해군지 2010년 3·4월호, 5·6월호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전차부대

해병대 연표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

1950년 12월 20일 해병대 재편성 : 사령부, 제1연대, 독립 5대대
1951년 02월 24일 제1포병대대 창설에 착수

1951년 04월 01일 해병학교 창설(진해)
1951년 05월 20일 해병대 사령부 - 진해에서 부산으로 이동
1951년 8월 25일 제1전차중대 정식 창설
1951년 11월 30일 제1공병중대 창설
1951년 12월 27일 서해 및 동해 출동부대를 통합한 제2연대를 도서부대로 개편
1952년 01월 05일 신병교육대를 해병훈련소로 개편
1952년 02월 10일 부산 영도에서 해안공병중대 창설
1952년 03월 17일 제1연대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 장단지구로 이동. 김포지역 독립 5대대와 연계하여 수도방위에 임함
1952년 04월 22일 해병학교 령 공포
1952년 05월 03일 해병훈련소 령 공포
1952년 10월 01일 해병 제1연대, 독립 5대대를 기간으로 해병 제1전투단 창설

*** 전차 교육 수료후 미해병대와 기념사진 (당시에는 미해병대서 전차교육을 직접 받았습니다.)

미해병 기갑학교 수료(전차장반) 1967년도

*** 6.25 한국전쟁에서 해병대 전차중대

1951년

실제 전투중인 해병대 전차 (외신 종군 기자 촬영. 1952년)

경북 안동에서 짚더미로 위장한 해병대 전차 (외신 종군 기자 촬영. 1952년)

서울 용산에서 이동중인 해병대 전차 (외신 종군 기자 촬영. 1952년)

해병대 최초 전차 중대장, 오상규 예비역 대령(92년 작고)

미 해병대로부터 전차 교육을 받고, 전차 중대 창설. 사진은 전차 중대 창설당시 전차 교육 수료식 장면.

오상규 예비역 대령 수료 (당시 대위)

전차 중대장. 오상규 예비역 대령 (1951년)

출동전 작전 지시 (1951년)

오상규 예비역 대령, 당시 계급 소령 (1951년)

1951년 해병대 전차 중대

해병대 전차중대 대원 (1951)

부대 시찰 중인, 당시 부통령 함태영님

*** 1953년 해병대 전차부대 모습 모음

전투중인 오상규 전차중대장

사진저작 : 오상규 예비역 해병 대령님의 자제분이신 해병 부사관 45기 오승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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